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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인문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워킨, 홍한별 옮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워킨, 홍한별 옮김, 문학과지성사


1. 요약 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Is Democracy Possible Here?)의 기본 골자는 책의 제목에서 드러난다. 곧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민주주의’는 기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정의와 한 발 더 나아가 ‘왜곡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늬만 민주주의’인 문제를 짚어보는 책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로널드 드워킨이 밝히는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다’라는 ‘명제’라기보다, 오히려 ‘토론’을 혹은 ‘논쟁’을 위한 ‘제언’에 해당한다. 책을 읽어보면 발견 할 수 있겠지만, 로널드 드워킨은 끊임없이 독자와 ‘논쟁’을 위해 문제제기 하고 예상되는 반론에 대비된 변증을 추가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다양한 수사를 활용하고 있다. 이어서 이 책의 간략한 흐름과 목차를 통해 큰 그림을 훑겠다.

먼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는 5장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1-4장 까지는 ‘민주주의’라는 기반위에 세워지는 다양한 ‘논제’를 풀어간다. 드워킨은 다양한 논제들 가운데, ‘뜨거운 감자’에 해당하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논의되는 논제를 들고 나온다. 첫 번째, ‘테러와 인권’ 두 번째, ‘종교와 존엄’ 세 번째, ‘과세와 정당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논리적 반박과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는 ‘인간 존엄의 두 차원’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첫 번째 원칙은 ‘본질적 가치의 원칙’이라 부르는 것으로써, 모든 인간의 삶은 특별한 객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원칙은 ‘개인적 책임의 원칙’으로 누구나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특별한 책임, 어떤 종류의 삶이 자신에게 성공적인 삶인지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는 책임을 이야기 한다. 결국 ‘사회’와 ‘국가’에서 ‘시민’은 최소한의 ‘인간 존엄의 두 차원’을 어떻게 획득하고 소비하며 누릴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에 집중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로널드 드워킨이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자신의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는 내용의 골자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존엄의 두 차원’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제도를 통하여 실현 되었는가? 지속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어떤 문제로 인하여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혹은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등등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로널드 드워킨이 원하는 ‘목적’(그가 바라보는 목표지점)은 ‘논쟁’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논쟁’을 통하여 성장하고 방황하는 길을 다시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감상평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 혹은 ‘국가’가 ‘민주주의’ 토대 위에 세워진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최소한의 기본권은 보장받는 곳으로 여긴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인식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렇다. 적어도 ‘대한민국’(혹은 로널드 드워킨이 이야기 하는 ‘미국’)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그것을 지킨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 사회와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날마다 뉴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마치 ‘과거’ 독재정권이나 그 이전의 폭력과 억압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되뇐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드워킨은 이야기 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와 국가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대 전제를 ‘다수결의 원칙’이 선으로 작용하는 사회라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수결주의 견해에서 민주주의란 다수의 뜻에 의한 정치”다. 시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참정권 투표권을 행사하여 선거를 통해 어떤 사안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대표(대통령)를 세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언제나 ‘다수’가 ‘공정’하거나 ‘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한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결정은 언제나 그에 못지않은 ‘소수’를 향한 억압과 소외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국가)는 ‘민주주의’를 표방 하면서, 언제나 ‘다수’를 ‘선’으로 ‘공정함’으로 때로는 ‘합리적’으로 인식했다. 다수이기 때문에 ‘선’하고 ‘옳다’는 막연한 기대와 심리에 기대어 끌려왔다. 대의를 위한 일이라는 명분에 따라 살아온 것이다.

사실,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 곧, ‘완전한 민주주의’를 본 역사가 없다. 그것을 수렴한 나라도 없었고, 시대도 없었으며 사회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이 진행형고, ‘연구 과제’ 였으며, ‘실험’이었다. 대부분은 ‘다수’가 ‘선’이라는 기대감으로 ‘민주주의’를 실현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기득권과 통치자들에게 전혀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가치를 생각한다면 역사가운데 그리고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민주주의’는 명확하게 ‘소탐대실’이다.

보이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기대’를 잡고자, ‘인권’(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상실했다. 로널드 드워킨은 바로 그 지점을 적시한다. 그리고 그 논제를 통하여, 올바른 민주주의가 가야할 방향은 언제나 논쟁을 통한 ‘가치 회복’에 놓여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험 은유’(4장)가 등장한다.

드워킨은 ‘정부’가 마땅히 가질 기본자세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정부는 통치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동등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 여기에 방점은 ‘모든 사람’과 ‘동등한’에 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의 모든 관심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관심이 주어질 수 있도록 제도와 방법 그리고 다양한 논쟁을 통해 그 해법을 찾아야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정부’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점을 향해 나간다. 비록 그것이 ‘이상’으로 존재함으로, 실현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방향은 그곳에 있다.

이 책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은, 사실 이미 오래전 2006년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다. 국내 번역이 2012년도에 이루어진 것을 본다면, 한 참은 늦은 시점에서야 독자들 손에 들어온 것이다(드워킨이 이 책에서 계속해서 언급하는 미국의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이다). 그런데,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소위 ‘문제점’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흡사하다. 종교와 정치가 결탁한 것도 모자라 ‘종교’를 도구화 함으로써, 입신의 발판으로 삼는 미국 정치인들의 문제를 읽다보면, 국회 안으로 입성한 교회 집사와 장로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장로 출신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외 드워킨이 지적하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 문제점은 고스란히 한국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 세상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뻔한 삶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로널드 드워킨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다수결의 정치’가 선으로 고착화되는 ‘미래’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관심을 보이기를 힘쓰는 정부 그러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많은 이들이 ‘논쟁’하고 검토 함으로써, 조금은 더디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그래서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패한 민주주의를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치열한 전장을 뚫고, 갈 것인가? 이제 우리는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